삼년산성(2013년 3월10일)
삼년산성 탐방
3월 10일 장모님 기일 보은에 내려갔다가 옆지기와 둘이서 삼년산성을 탐방 4개월여만에 처음으로 카메라를 접하게 되니
처음에는 어안이벙벙 제대로 담을수가 없었던것 같다.
삼년산성 [三年山城] : 충청북도 보은군 보은읍 오정산(烏頂山)에 있는 신라시대의 석축산성
둘레 1.68㎞. 사적 제235호. 오정산의 능선을 따라 세 봉우리와 서쪽 골짜기를 잇는 포곡식(包谷式) 산성을 이루고 있으며,
산은 그리높지 않지만 여러 전망대및 산성둘레에서 바라보면 보은읍의평야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470년(자비왕 13)에 축조했는데,
〈삼국사기〉에 따르면 성을 쌓는 데 3년이 걸려 삼년산성이라 불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오정산성이라고도 했다.
성벽은 납작한 판돌로 한 켜는 가로로 놓고 다음 한 켜는 세로로 놓아 우물 정(井)자처럼 엇물려 쌓았다.
특히 기초를 견고히 하여 하중을 잘 견딜 수 있게 했으며, 성벽이 높은 곳은 13m에 달한다.
동서쪽 성벽은 바깥쪽에 돌을 쌓고 안쪽에 흙으로 다진 내탁외축(內托外築) 방식이며,
남북쪽은 안팎에 돌을 쌓고 그 안에 돌을 채운 내외협축(內外夾築) 방식이다. 성문터는 동서남북 4곳에 있으며,
서문터에는 너비 165㎝ 간격의 홈이 패어 있어 큰 수레가 다녔던 것으로 보인다.
7개소의 옹성(甕城)은 대개 둘레가 25m, 높이 8.3m로서 지형상 적의 접근이 쉬운 능선과 연결되는 부분에 축조했다.
수구는 서쪽 성문 옆 계곡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오각형의 수문이 동쪽 성벽에 남아 있다. 우물터는 5개소가 있었는데,
그중 아미지(蛾眉池)라는 곳이 유명하다.
보은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삼년산성은 흰색 벽돌 같은 화강암으로 현대의 건축물처럼
단단하게 쌓아올린 산성으로 무려 1,500년 전 3년의 시간 동안 3,000명이 동원되어 쌓았다는 삼국시대의 산성이다.
신라가 중원지역의 거점을 확보하고 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전체 길이 1.7㎞, 높이 13m에 이르는 산성은
가로와 세로로 혼용된 축성방식으로 일반적으로 흙으로 내부를 채우는 다른 산성과 달리 내부까지
단단하게 돌로 채워진 철옹성이다. 실제 삼국통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수많은 전투가 산성을 중심으로 일어났으며
기록상으로는 한 번도 함락된 적이 없는 성이다.
주차를 시켜놓고 산성의 출입구가 있는 서문지까지 약250여m 진행하면 서문에 당도하게 되며 새로이 축조한 성이 웅장하게
삼년산성의 성문터는 동서남북 4개가 있으며, 서문터에는 너비 165cm 간격의 홈이 패여져 있어
큰 수레가 다녔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곳이 주 출입문으로 추정되는 서문지로써 산성문지 중 가장 낮은곳에 위치한다.
성벽이 안쪽으로 휘어 있고 계곡부의 중앙에서 북쪽으로 약간 비낀 지점의 북쪽 경사면에 있어 성밖에서 문의 위치가 확실하게
드러나 보이지 않는곳에 있다.서문지를 중심으로 남북으로 2개의 치성이 배치되어 있어 성문으로 접근하는 적을
쉽게 공격할수 있는 구조를 갖추고 있다.
서문을 통과하면 삼년산성 전체 배치도가 있고 남북으로 성곽을 오를수 있게 되어 있는데
언제나 처럼 좌측길인 북문으로 향하는길로 탐방을 시작하게 되네요.
아직도 몸상태가 온전치 못함에 처음시작하는 오름길이 조금은 힘들지만,차근차근 오름을 시작합니다.
북문으로 향하는길로 오르면서 서문과 남문으로 이어지는 성곽을 담아봅니다.
축조된 성곽을 배경으로
가파른 게단을 올라서면 우측방향으로 내려서야하고 북문과 성벽이 보인단답니다.
이곳으로 진행을 하여야하고요.
북문으로 내려서기전 보은에서 청주방향으로 향하는 도로와 주변 마을의 전경이 펼쳐지고요.
북문의 모습입니다.
북문지
북문지는 성문 밖으로 차단벽이 설치되어 있어 북문으로 접근하는 적들을 쉽게 방어할수 있는 독특한 구조의 성문양 식으로
보았으나, 발굴조사 결과 차단벽으로 추정되는 시설은 후대에 축조된 치성으로 밝혀졌으며
현재의 성문은 조선시대에 조성된것이다.
북문의 바깥쪽에서
북문의 외벽부분의 허물어진 부분과 북쪽옹성이 높게 쌓여 있는게 보이네요.
삼년산성은 외벽과 내벽 사이가 흙이 아닌 돌로 채워져 그 견고함은 당대 최고 수준이다.
크고 작은 돌을 수직으로 쌓아올렸는데 작은 틈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정밀하다.
산 정상을 원형으로 둘러싸며 세워져 있는 이 성벽만으로도 산성의 위용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성벽 바깥쪽으로는 바로 깊은 계곡이 있어 정해진 길이 아니면 성벽까지 오르지 못하는 구조이다.
난공불락의 요새로써산성의 역할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적의 침략을 완벽하게 막아내는 일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서로 대결하던 시대에 전쟁의 승패를 좌지우지 하는 것은 산성이었다.
거의 모든 전투가 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에 견고한 성을 확보하고 있는 쪽이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따라서 삼국은 성을 쌓은 일을 대단히 중요한 일로 여겼다.
북쪽옹성에서 바라본 북문방향의 성곽
옹성에서 바라본 보은읍 종곡리및 괴산방향
속리산 방향 저수지가 보이고 저수지위로 말티재
보은에서 상주로 향하는 방향
동문으로 이어지는길은 약간의 오름길
이곳에서 내려서면 동문에 도착하게 됩니다.
동문지
동문지는 산성에서 가장 긴 동쪽 성벽의 중앙에 있으며, 이곳에는 성벽을 관통하는 수구가 있다.
동문지의 원래 모습은 성벽의 안쪽 약 절반 정도가 다른곳 보다 북쪽으로 돌출되어 있고 "ㄹ"자형으로
돌아야만 통행이 가능한 형태였다.
1500여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래도 성곽의 모습이 남아 있다는게 정교함의 극치라 할수가 있겠죠
삼년산성은 안과 밖의 성벽이 모두 돌로 쌓인 석성으로 성의 전체 길이는 1.7km이며 성벽의 높이는 13~20m,
그리고 동서남북 네 방향에 성문을 두었는데 지금 성문은 모두 없어진 상태라고 합니다.
성벽을 쌓은 돌들은 모두 얇고 넓적한 판돌로 손으로 일일이 다듬은 다음에 한 켜는 가로로 쌓고
한 켜는 세로로 쌓아 우물 정(井)자 모양이 되게 했는데 이 방법은
성 위쪽의 무게가 아래로 고루 퍼지게 하는 기술로 성이 쉽게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정교한 축조방법이었다고 합니다
남쪽옹성에서 바라본 중앙부의 구병산의 모습
남쪽옹성부근에서 성안쪽의 모습
아래의 연못인 아미지를 비롯하여 보은사란 작은 사찰까지 한눈에 들어 오네요.
남문지
남문지는 남쪽 성벽 서쪽끝에 위치하며, 남서쪽 모서리에 설치된 성위에서 적을 감시하거나 공격하기위해 지은 치성이
방향을 북쪽으로 회전하며 서쪽 성벽과 연결된다.문밖으로는 작은 계곡부가 있으며 이 계곡부를 중심으로 양쪽의 능선부로
이어지는 성벽에는 반원형 치성이 설치 되어 있어 남쪽으로 접근하는 적들을 쉽게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남문에서 서문방향으로 내려서면서 담아본 보은들판의 전경과 좌측의 금적산을
보은군청과 체육관을
성벽 내부의 연못 주변에 남아 있는 암벽에는 여러 글씨가 탁월한 모습으로 암각되어 있다.
신라 최고의 명필로 이름 높았던 김생의 글씨로 추정된다 하니 다시 한 번 눈길을 주게 되고
천 년을 넘는 세월을 이어온 글씨는 춤을 추듯 화려하다.
서문에 도착 오늘의 삼년산성 탐방을 마치게 되네요.
2년여만에 다시찾은 삼년산성 몸상태가 좋지못한 가운데 오랜만에 사진을 담아 간직하게 됨에 감사를
삼년산성 안내도에서 바라본 성곽의 모습